몰입의 즐거움

다산 정약용 생가

삼스카라 2007. 2. 3. 23:50





















1920년 을축년 물날리로 모두 사라졌으며

지금의 것은 그 이후 복원한 것이다.

다산 3형제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약종은 처형당하고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다산이라는 호는 유배지 강진 귤동마을 뒷산 이름이다.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다산 기슭에 초당을 짓고 차와 선을 통해 초의선사와 우정을 나누는 한편,

제자를 기르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

1818년에 귀향살이에서 풀렸을 때 다산은 57세로 이곳 마현마을 생가에 들어 왔다.

큰형 약현이 생가를 지키고 있었을 뿐 부모형제 모두 떠나고 집안은 쇠락해 있었다.

그 후 다산은 74세로 새상을 뜰 때까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

"다산은 실학자로서 풍수의 폐단을 지적하고 풍수 부정론을 폈었지."

우규 정득량에게

"외람된 말씀 같네만 나는 이자리에서도 자업자득을 말하고 싶네.

이곳은 맥이 잘 내려왔슴에도 혈을 맺지 못한 자리야.

주룡을 따르며 오는 호종사나 보국이 전혀없고 변화도 없어, 묘 뒤로 난 능선을 따라가 보겠나

마치 죽은 뱀과 같거든 그렇거니 더 가다가 보면 맥이 끊겨 버렸어.

죽은 용이어서 부장지야. 집터로 봐서는 절대로 흉한 곳이지.

청룡과 백호도 감싸주지 못하고 달아나 버렸고 더 큰 흠은 물이 들어 온다기 보다는 일직선으로 찌르고

대드는 형상으로 수살(水殺)을 띠었어."

태을이 이렇게 혹평한 위인의 유적은 일찍이 없었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감정이 섞인 느낌이었다.

"묘는 그렇다 쳐도 이 집터 까지 그렇게 나빴다면 다산 같은 인물이 어떻게 났을까요?"

:

득양은 이 집터가 좋다는 걸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풍수를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그렇게 좋은 터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산은 분명 조선 후기의 최고의 학자였다.

"인물은 어디에서나 태어날 수 있어. 풍수를 무시하고 물 위나 나무위에 집을 짓고 살아도 인물은 태어나거든.

문제는 순탄하게 뻗어가는냐 도중에 꺾이느냐 하는 것이야.

지기의 도움없이 장구한 뻗어 나갈 수 없다는 얘기네."

"더 아쉬운 점이 뭔줄 아는가?

풍수지리는 크게 풍수적인 면과 지리적인 면이 있거든.

그런데 왜 다산이 미신으로만 치부하고 부정했는지 몰라.

어지러운 술법은 차치하고라도 유용한 면은 더 연구해서 실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었는데.

확실히 儒家의 먹물들은 현장에 약해.

풍수를 제대로 알려면 우리처럼 발로 밟고 다니면서 익혀야 하네."

부인할 수 없는 논조였다.................................................진태을이 정득량을 실습시키는 내용

소설 '풍수' 4권에 진태을이 제자 정득량에게 죽기 얼마전에 얘기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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