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즐거움

은이성지

삼스카라 2007. 4. 21. 18:42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은 타민족이나 타국가에 귀감이 될 만하다.

그 이유는 선교사에 의한 선교가 아닌 우리 민족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 공

동체를 성장시킨 역사 때문이다.

앵자산의 천진암·주어사에서(1777~1779년) 천주교 교리 연구 및 신앙 실천에

이어 중국 북경에 파견된 이승훈이 1784년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 성사를 받고

귀국함으로써 신앙 공동체가 태동되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북경 천주교회를 모방해서 10여명의 신부를 정하고

성무활동으로 성사를 베풀었으며, 2년여간의 가성직제 실시 후 자신들의

잘못을 발견하고 북경 교구 주교에게 서신을 보내어 지도를 받게 된다

(1787년 10월).




우리 선조들이 시작한 교회의 첫 사업으로 우선 성직자 영입을 꼽을 수 있다.

교우 공동체는 점점 더 커져 갔지만 성직자를 없는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천주교 신앙생활과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초창기 지도자들은

그 어느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뜨겁게 성직자 필요성의 대한 인식과 더불어

성사(聖事)의 은총을 갈망하게 된다.

이러한 열망은 자연히 성직자에 대한 관심과 존경으로 이어졌으리라 보여진다.

따라서 초창기 때부터 우리 선조들은 계속되는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 성직자 영입과 성소자 발굴,

성직자 양성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첫 소득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입국(1794년)이다.

그러나 성직자를 모셔들인 기쁨도 잠시, 1801년 신유대박해로 조선에 유일한

목자를 잃게 된다.

하지만 조선 교우들의 가슴 속에는 신앙의 보존과 공동체 건설 및 확장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영적 성장을 위해 성직자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따라서 선교사(성직자) 영입 운동을 계속해 나간다.




조선교회는 1801년 신유년 대박해 이후 유일한 목자였던 주문모 신부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순교로 큰 고비를 맞았지만 박해의 여파가 수그러들 무렵 성직자

영입 운동의 불씨를 살리게 된다.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평신도 지도자들은 또다시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 교구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청에까지 서신을

보내게 된다(1811년, 1825년).

그중 1825년에 보낸 서신은 교황 레오 12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만큼

‘조선의 교회 공동체를 돌보아 주십사’하는 애절한 호소였다.

30여 년 간의 세월을 조선의 교우들은 성직자를 목마르게 갈망하며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윽고 레오 12세 교황의 뒤를 이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 대리 감목구가 설정(1831년)되었으며,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신부들을 영입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처음 조선 땅에 발을 디딘 프랑스 선교사는 모방(Maubant, 1836년) 나 신부였다.

바로 이 모방 신부에 의해서 한국의 첫 성소자 세 소년이 발탁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다.

동시에 조선 자체에서도 선발된 세 명의 평신도에게 신학공부를 시켰지만

1839년 기해 대박해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성직자 세분(나 모방 신부, 정 샤스땅 신부, 범 앵베르 주교)마저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이제 남아 있는 교우들에게 조선 땅에 한분의 성직자도 남아있지 않은 신앙의

단련이 기다리는 광야의 생활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계속된 박해로 성직자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조선의 교우들,

성직자를 모셔들이기 위해 흘려야만 할 피땀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고귀한 신앙정신은 우리 선조들이 남겨 주신 아주 값진 보물이었다.

더 나아가서 성직자를 청하여 모셔들이는 소극적인 노력에만 그치지 않고 스스로

성소자를 발굴하고 성직자를 양성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선조들의 노력은 눈물겨운 삶이었다.

기해박해로 성직자를 잃은 교회는 슬픔에 잠겼지만 1845년에 이르러서는

10년 전에 이 땅에서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첫 사제가 들어옴으로 해서

그 결실을 거두게 되어 기해박해 이후 6년이라는 시련의 징검다리를 건너 방인

성직자를 맞이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세 소년 중 제일 먼저 서품을 받은 사람은 김대건이었다. 그는 중국 상해 근처

‘김가항’ 성당에서 1845년 8월 17일 여러 명의 조선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제서품을 받게 되고, 한달여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되어 조선의 교회 공동체,

조선의 교우들에게 다시없는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1821년 8월 21일 : 출생.

1836년 4월 : 골배마실 이웃의 ‘은이 공소’에서 모방(Maubant) 신부에게 세례를 받

은 뒤 신학생으로 발탁.

1836년 12월 2일 : 동료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순명과 복종 서약 후 다음날

마카오로 출발.

1837년 6월 7일 :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마카오에 도착.

1841년 11월 : 철학과정 이수, 신학과정 입문.

1844년 12월 : 최양업과 함께 삭발례부터 부제 서품까지 받음.

1845년 1월 1일 : 조선교회 밀사와 상봉하여 조선에 귀국.

1845년 3월 : 서울에서 신학생 2명을 지도함.

1845년 4월 30일: 선교사 영입 위해 제물포 출발.

1845년 8월 17일 : 상해 연안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

1845년 11월~1846년 4월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사목 활동.

1846년 4월 13일 : 은이 공소에서 미사 후 입국로 개척을 위해 서울로 출발.

1846년 6월5일 : 인천 앞바다 순위도에서 체포됨.

1846년 9월16일: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

1857년 9월 23일 : 가경자로 선포됨.

1925년 7월 5일 : 시복됨.

1949년 11월 15일 : 모든 한국 성직자들의 대주보로 결정됨.

1984년 5월 6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102위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됨.


조선의 교우들은 항상 예고 없이 닥친 박해로 어렵게 모셔들였던

성직자를 번번이 잃게 되어 쓰라린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에 이미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 길에 올랐던 본방인(한국인)

사제를 맞이했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이제 한국인 사제로는 처음 서품되어 귀국 길에 오른 김대건 신부는

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강경 부근의 황산포(나바위)에 무사히

상륙하여 사목 활동에 임하게 된다.

고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 활동 지역은 은이를 중심으로

용인, 이천, 안성 지역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은이는 박해 시대 숨어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이룩된 교우촌이고, 은이(隱里)라는 말 그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김대건 신부는 은이를 중심으로 경기 이천, 용인, 안성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바로 이 은이성지는 이미 유학 길에 오르기 전, 1836년 나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 그리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처음으로 조선 교회 안에 자발적으로 시작된 성소자 양성의 결실을 맺은 곳이

‘은이성지’이다.

이렇게 은이는 김대건 신부에게 있어 첫 사목 지역이었고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상 본방인 사제가 사목한 최초의 본당이었다.

이 시기에 김대건 신부는 경기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틔, 검은정이,

먹뱅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에 행하신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 모습은 1866년(병인박해) 남한산성에

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 가문에 정 레오 신부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집안 어른들께서는 김 신부님께 성사(고해성사)받던 이야기를 하시곤 했는데

김 신부님은 항상 밤으로만 다니셨다 한다. 미사짐도 없이 단내(丹川)에서 10리가

채 못되는 동산 밑동네(東川里)에서 오시어 고해성사만 주시고 바로 떠나셨다 한다.

김 신부님과 복사가 깊은 밤중에 대문밖에 오시어 ‘정생원! 정생원!’ 하며 증조부

바오로를 찾으시는 소리에 식구들은 모두 잠을 깨었으나 누가 무슨 일로 찾는지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복사가 작은 목소리로 ‘김 신부님께서 성사 주러 오셨으니 주저하지 말고 빨리

나오시오’하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나 증조부 바오로께서는 이웃이 알까

쉬쉬하며 반가이 신부님을 방으로 뫼시고 곧 성사 받을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는 간단하였다.

벽에 깨끗한 종이를 한 장 붙이고 그 위에 십자가상을 정성되이 뫼셔 건다.

김 신부님께서는 10여명의 고해자들에게 성사를 주시고 다시

배마실(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 양지성당 소재지)로 가시어 거기서

성사를 주시고 ‘은이’로 가시면 날이 샌다고 하신다.”

이 증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험한 산길을 밤으로만

다니면서 사목 활동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6개월 간의 사목 활동을 하시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의 명령이

새롭게 주어진다.

그 명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선교사들과의 연락, 또 곧이어 조선에 입국해야 할

매스뜨르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기 위한 임무였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는 또다시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이별이 모든 교우들이 예상했듯이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조선 교회의 숙원 사업인 성직자 영입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게 된다.

은이를 떠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 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이 말씀을 은이 공소와 용인 지방 교우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남기시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교우들은 떠나시는

신부님의 모습을 은이성지에서 1Km 정도 떨어진 ‘중담’ 모퉁이까지 나와

눈물로 전송했다.

그동안 교회 내에서 잊혀져 왔던 은이성지의 개발은 1992년 6월부터

시작된 서울교구 주평국 신부의 ‘도보성지 순례’를 계기로 알려지고,

1996년 5월 은이 공소터 530여평을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같은해 6월에는 야외제대와 김대건 신부 성인 상을 세우고 성상 축복식을

거행하게된다.

또한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도 시작되고, 2002년에는 은이성지

주변 5200여평 매입과 이어 2003년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을 포함한

1200여평을 매입하면서 그해 9월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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