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묘소는 고택 왼쪽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번잡스러운 석물로 치장되어 있지 않고 다만 생전에 남긴 글씨를 집자한 비석 하나만 있을 뿐인 묘소는 깔끔하다.
과천에 있던 것을 1930년대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라 한다.
내포평야의 나지막한 구릉에 터를 잡은 추사고택(秋史古宅).
풍수전문가들은 추사고택 터가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운(書卷氣)이 감도는 명당’이라고 말한다.
즉 날카로운 바위산이 보이지 않는 대신 부드러운 언덕이 집터를 에워싸고 있어 문기(文氣)가 무르녹는다는 것이다
:
추사 집안은 16세기 중반부터 가야산 서쪽 해미 한다리(서산군 음암면 대교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명문.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 1720~1758) 때부터 현재의 자리인 예산 용궁리로 옮겨 살게 된다
추사고택에서 60m쯤 거리에 있는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심은 나무다.
1809년(조선 순조 9) 10월에 부친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묘 옆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일정이 늦어 보고자 했던
안채 정면의 기둥에 걸려 있는 ‘대팽두부과강채 고희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이라는
예서체 글귀는 못 본게 서운하다.
:
해석하면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와의 만남이라’는 뜻.
:
이는 추사가 과천에 머물던 시절 71세로 세상을 떠나기 두세 달 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작.
떵떵거리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나 나중에는 온갖 풍파를 겪어온 추사가 인생의 의미는 소박하고
평범한 것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는 듯하다.
또 ‘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라는 글귀도 인기가 있다.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여라.
:
매번 지나던 길
추사고택의 역사를 알고 있었고가까이가진못했지만
오늘은 외부에서 보는 것만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이른 시간에 다시 와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