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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석유화학 플랜트

태영화학 제1석유화학 플랜트 와 그 외Chemical Engineering을 공부하고 플랜트를 다루지 않고 졸업과 함께같은 ITEM의 무역의 일을 지금 껏 주로 하고 있지만 왠지 오늘 플랜트를 보는 감회가 새롭다.전기,전자공학과 생명공학 모든게 다 우리의 경제를 이끌었지만1660년대초 전후 상황으로 아무도 투자할 생각이 없는 불모의 땅 대한민국..현재(SK CORP)에 걸프의 자금을 끌어 들이며 모든 차관을 고 박정희대통령의지시로 국가가 입보하는 걸 이후로 한국에 투자하는 칼텍스(현재GS), 아람코..중화학 산업을 육성한 그 기초로 오늘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는 민족으로 평가 받았으리아..하지만 공해문제 및 부작용도 있었으리라..새롭게 생각나는 단위들을 생각해 내며 상념에 접어든다..그 간의 시간들..

몰입의 즐거움 2007.02.06

處容岩(처용암)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에 있다.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 놀이를 와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운무가 심해 앞을 볼 수 없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바다 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야 한다고 했다. 왕이 곧 명을 내려 근처에 용을 위한 절을 세우도록 했다. 이곳이 울주군 청량면에 있는 망해사이다. 그러자 운무는 씻은 듯이 걷히고 해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 지역을 개운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동해 용왕이 크게 기뻐하여 일곱 왕자를 거느리고 바다 위로 올라와 춤을 추었는데 그 아들 중의 하나인 처용이 왕을 따라 경주로 갔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고 급간(級干)이란 벼슬을 얻어 나랏일을 도왔다. 처용이 바다에서 올라온 이 바위를 처용암이라 불렀다. :SK케미칼 초입에 있어 지나가다 셧..

몰입의 즐거움 2007.02.06

분당요한성당-대성당 내부모습

분당요한성당은약 16,000의 신자가 미사를 드리는 곳이며 대성당은 3,000명이 동시에 미사봉헌도 가능하다은퇴하신 김영배요한 신부님과 신자들이 1993년 1월부터10여년을 공들여 건립하여 봉헌한 아름다운 성당이다.: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그 시기에 성 김대건안드레아신부님의 순교후 세상의 눈을 피해 밤을 이용하여 시신을 운구하였으며남태령고개를 지나 요한성당이 있는 태재고개를경유 미리내성지에 모셨다고 하여이 곳도 성지라 하기도 한다.:가을에는 이 곳에서 가을 음악회(해바라기,김세환,전인권,인순이 등)를 열기도 하며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도 자주 공연을 하는 곳이다.분당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이름나 있으며특히 성가대의 발표회,파이프오르간 연주회,청년 풍물패의 사물놀이도 행사때 빠지지 않은 볼거리를 제공한다.대성..

몰입의 즐거움 2007.02.04

분당요한성당-하늘마당

'하늘마당.은요한성당 2층에 있으며 월요일은 휴일로 정해져 있으며월요일 빼고는10시부터 저녁8시까지 문을 연다.2006년에 당시 주임신부 한상호마르꼬신부님의 제안으로청소년문화공간으로 열었으며~독지가 한사람이 부담하여 이 자리를 있게 하였다.차값은 시중보다 반값이며 맛은 정말 좋다.특히 은은한 커피향이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또 간단한 먹거리가 준비되어 있으며 주일은 주먹밥,김밥도 초딩들이 많이 찾고 특별히 핫초코를 저렴하게..지금은 일반인 들도율동공원에 왔다가 많이 찾아오며매주 수요일은 영화상영(DVD)도 한다.

몰입의 즐거움 2007.02.04

분당요한성당-성모상,착한목자예수,피에타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님께서 돌아가신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다. 옷이라는 것은 미켈란젤로에게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가지며, 옷으로 감싼다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현실적인 위협으로부터 수호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채색된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푸른색이었을 마리아의 옷을 대리석에 의한 형태로만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대리석으로 구겨진 옷자락의 주름을 만들어 그것을 그리스도를 지키는 하느님의 옷으로 표현하였고, 후광이나 가시와 같은 상징도 마리아의 청순하고 경건한 얼굴과 육체의 표현 속에 담았다. 이 피에타 ..

몰입의 즐거움 2007.02.04

다산 정약용 생가

1920년 을축년 물날리로 모두 사라졌으며지금의 것은 그 이후 복원한 것이다.다산 3형제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약종은 처형당하고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다산이라는 호는 유배지 강진 귤동마을 뒷산 이름이다.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다산 기슭에 초당을 짓고 차와 선을 통해 초의선사와 우정을 나누는 한편,제자를 기르고 학문과 저술에 힘썼다.1818년에 귀향살이에서 풀렸을 때 다산은 57세로 이곳 마현마을 생가에 들어 왔다.큰형 약현이 생가를 지키고 있었을 뿐 부모형제 모두 떠나고 집안은 쇠락해 있었다.그 후 다산은 74세로 새상을 뜰 때까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다산은 실학자로서 풍수의 폐단을 지적하고 풍수 부정론을 폈었지."우규 정득량에게"외람된 말씀 같네만 나는 이자..

몰입의 즐거움 2007.02.03